
[서울=뉴시스]이수지 기자 = "모든 것은 결국 소멸합니다. 다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여든을 훌쩍 넘긴 배우 박정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그는 삶의 중심에 서 있었다.
63년째 무대를 지키고 있는 그는 "막상 내가 죽음을 앞에 뒀을때 두려워할 까 겁이난다. 죽음을 잘 받아들이는 일, 그것이 결국 잘 사는 일"이라고 했다.
지난 23일 서울 흑석동 원불교소태산기념관. 낭독극 '범부가 깨쳐 부처가 되듯' 공연을 일주일 앞둔 날. 박정자는 오전 내내 리허설을 마치고서야 자리에 앉았다.
피로가 묻은 얼굴이었지만, 목소리를 또렷했다.
"청심환을 먹었어요. 체력이 나아지지는 않겠지만, 내 마음을 준비하는 거죠."
그가 이번에 맡은 작품은 원불교 교조 소태산 대종사의 열반을 그린 낭독극이다.
박정자는 "여럿이 하는 연극이 아니라,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돼 있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내가 이끌어 가야하니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공연은 목소리와 어법이 정확해야 관객이 따라올수 있다"며 "낭독은 발성이 흔들리면 설득력이 사라진다"고 강조했다.
박정자는 지난 5월 배우겸 유준상 감독의 연출작 '청명(淸明)과 곡우(穀雨) 사이'로 스크린에 섰다.
유 감독은 '죽음이 낯설지 않은 나이대의 연극배우'를 찾다 그를 떠올렸다. 영화는 삶과 죽음을 따라가며 결국 '생명력의 발산'을 이야기한다.

[서울=뉴시스] 황준선 기자 = 배우 박정자가 23일 서울 동작구 원불교소태산기념관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5.10.23. hwang@newsis.com
강릉 순포해변에서 상여가 나가는 장면을 찍을 때, 그는 150여명의 지인을 초대했다. '생전 장례식'으로 초대한 것이다. 그는 감독에게도 울긋불긋한 큰 상여 대신 진도 씻김굿에 한지로 만든 흰 상여로 하자고 제안했다. 상여도 자신이 들었다.
"상여가 나가는데 슬픈 장례가 아니라, 삶의 또 다른 축제였으면 했어요."
촬영을 마친 뒤 그는 실제로 입던 옷과 상여를 태웠다. 당시를 회상하는 그의 얼굴에는 편안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때부터는 모든 게 보너스예요. 사전 장례식을 치렀잖아요. 인간이란게 너무 보잘것 없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잘 받아들이고 싶어요."
영화에는 그가 출연했던 대표작 제목을 적은 만장 180개가 등장한다.
"내가 걸어온 시간이 그만큼이나 많더군요. 그걸 보며 내 인생을 정리했어요."

[서울=뉴시스] 황준선 기자 = 배우 박정자가 23일 서울 동작구 원불교소태산기념관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5.10.23. hwang@newsis.com
1962년 이화여대 연극반 시절 '페드라'로 무대에 오른 그는 올해로 데뷔 63년을 맞았다. 올해까지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연극 무대에 섰다.
'키 큰 세 여자', '나는 너다', '햄릿', '오이디푸스', '피의 결혼', '위기의 여자', '신의 아그네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등. 그의 이름은 곧 한국 연극의 한 페이지였다.
세월 앞에는 장사 없듯, 그 역시 체력의 한계를 절감한다고 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럭키역? 지금 하라면 못할 것 같아요. 작년만 해도 그런 용기가 있었는데, 이제는 없어요. 하지만 내 나이로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하지만 작품에 대해 '싫은 거는 싫다, 옳은 건 옳다, 그런 건 그르다'라고 할 수 있는 용기가 죽는 날까지 소멸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서울=뉴시스] 황준선 기자 = 배우 박정자가 23일 서울 동작구 원불교소태산기념관에서 뉴시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10.23. hwang@newsis.com
지금도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무대를 찾는다. '한중록'을 바탕으로 한 '꿈속에선 다정하였네', 정순왕후의 한을 다룬 '영영이별 영이별’, 원불교 '대각개교절(大覺開敎節)' 기념 낭독극 '먼동이 터오르는'에 이어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를 그린 '범부가 깨쳐 부처가 되듯'까지. 올해만 벌써 두번째 낭독극이다.
배우 박정자의 존재를 기억하는 또 하나의 축은 '목소리'다.
디즈니 본사가 극찬했다는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문어 마녀 우르술라 더빙, 영화 '기생충' 예고편 내레이션 등 그의 목소리는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존재감을 남겼다.
"처음엔 제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물이에요. 어머니가 주신 유산같아요."
그는 여전히 무대에서 관객과 대화하는 방식을 '목소리'로 본다.
그는 "매우 정확한 발성과 정확한 어법으로 하지 않는 것을 내가 못 참는다. 관객들이 제대로 알아들어야 극에 끌어들여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정확한 발성과 어법, 그것은 배우의 품격"이라고 말했다.

[서울=뉴시스] 황준선 기자 = 배우 박정자가 23일 서울 동작구 원불교소태산기념관에서 뉴시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10.23. hwang@newsis.com
그는 요즘 조금씩 집을 정리하고 있다. '인간 박정자'의 인생을 정리하는 중이다.
"어제 하루종일 집에 있으면서 입던 옷을 정리했어요. 지저분한 걸 남기지 않고 가고 싶어요. 살아있는 사람에게 짐이 되지 않고 싶지만 참 쉽지 않네요."
'연극 배우 박정자'의 기록은 아르코 예술기록원에 보존돼 있다.
하지만 그는 나지막이 물었다.
"인간 박정자 하면 뭐가 남을까요?"
그의 목소리는 잠시 떨리는듯 했지만 곧 단단히 가라앉았다. 반세기 넘게 무대 위에서 삶과 죽음을 연기해온 배우의 마지막 대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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